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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에서 2018년 11월 28일 사의찬미死―讃美가 첫방되었습니다.


사의찬미

死―讃美


  드라마 사의찬미에서는 윤심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진의 아내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 자리는 애초에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우진을 바라보며 이야기 나누고, 우진의 따스한 손을 잡은 채 거리를 걷고 싶었다. 이 또한 나의 욕심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욕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해서 그 사랑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 사랑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내겐 부양해야 할 부모가 있으며, 공부시켜야 할 동생들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상기하며 나는 우진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리고 우진을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깨달았다. 애초에 나는 우진에게서 멀어진 적이 없었다는 것을. 나는 그에게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지만, 그는 내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어 미안하다 말한다. 나는 정말이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우진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윤심덕

尹心悳


  윤심덕은 1897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1926년 8월 4일사망한 성악가이자 배우입니다. 사랑해선 안되는 그남자 김우진과 동반 자살했다고 합니다. 호는 수선(水仙)이며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 강원도 원주에서 1년여 동안 소학교 교원을 한 뒤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우에노 上野음악학교 성악과에서 수업받았습니다. 1921년 동우회 등의 순회극단에 참여하면서 극작가 김우진과 친교를 맺었고 1922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조교생활 1년을 마친 뒤, 1923년 6월 귀국하자마자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가짐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열리는 모든 음악회 프로에는 항상 윤심덕을 넣을 만큼 일약 스타가 되었고 양악이 수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가 제대로 성악을 공부한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으며 윤심덕의 풍부한 성량과 당당한 용모 또한 대중을 휘어잡았다고 합니다.

  대형 오페라가수를 꿈꾸었던 그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중가요를 부를 수밖에 없었고 그녀가 꿈꾸었던 예술 조국을 만들기에는 이 땅이 너무 낙후했고 견고한 유교적인 인습은 그녀를 더욱 못 견디게 하였다고 합니다. 유부남 김우진과의 사랑은 진보적인 도덕관을 지닌 그녀를 궁지로 몰아갔고 1926년 여동생 성진의 유학길 배웅을 위하여 일본에 간 그녀는 닛토레코드회사에서 24곡을 취입한 뒤 먼저 와 있던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정사(암튼) 그녀가 남긴 사의 찬미는 오늘까지 널리 불리고 있습니다.    [자료출처]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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